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산동파병 (문단 편집) === 일본군의 출병 === 다나카 기이치는 취임 직후 4월 22일 시정방침 연설을 통해 중국에 대해 간섭할 것임을 명백하게 드러냈다. >"[[일본 제국|우리나라]] 및 극동에 가장 중대한 외교문제는 중국이다. 중국 국민의 정당한 요망에 대해서는 상당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그것을 달성하는 길도 마땅히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해서는 중국 국민도 역시 신중하게 반성, 숙고할 것을 희망한다. 특히 공산당의 활동으로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일본의 입장으로서, 또 동아의 평화 유지에 큰 책임을 지고 있는 일본으로서 이에 무관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국민혁명군]]이 5월 21일 진포철로의 요충지 방부를 점령하고 쉬저우를 향해 전진하여 산동성의 장쭝창의 본거지를 공략하려 하자 5월 28일[* 혹은 5월 27일.]의 각의에서 관동군의 산동반도 파견을 결정하였다. 다나카는 다롄에 주둔한 관동군 제10사단 33여단에게 출동명령을 내렸고 5월 30일 다롄을 출발한 2천명의 관동군은 쉬저우 함락 직전인 6월 1일[* 혹은 5월 31일.] [[칭다오시]]에 상륙하여 교제로를 제남으로 출동할 준비를 갖추었다. 일본 정부는 다음과 같이 성명하였다. ||난징, 한커우 등의 사건으로도 분명하듯이 일본 측의 거류민 보호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일본인의 생명, 재산에 위해가 가해지고, 일본의 명예도 손상되는 폭거가 계속되고 있다. 이들의 동란은 화북에도 똑같은 불상사가 재발할 우려가 있다. 때문에 일본은 거류민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부득이 육군을 출병시킨다.|| 이 사실은 열강과 더불어 난징, 우한, 베이징에 모두 통보되었다. 열강은 이에 호응하여 미국과 영국이 각각 2천명의 병력을 텐진과 베이징에 증강시켰다. 관동군의 목표는 북벌군의 전진을 저지하는 것으로 [[장쭝창]]과 [[쑨촨팡]]을 원조하는 한편 산동성에서의 전황을 관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